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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평] 화음의 전위와 해결, 그 다음을 기다리며 (평론가 이민희)
25. 12. 30.
화음의 전위와 해결, 그리고 그 다음 이야기의 무대화를 기다리며
이민희 (음악평론가)

<화성학실습> 쇼케이스 공연 리뷰
2025년 10월 20일 TINC
2025 서울국제공연예술제에서 EMT가 제작하고 김재훈이 연출을 맡은 <화성학실습>이 무대에 올랐다. 이 공연은 2025년 10월 20일 TINC(this is not a church)에서 워크숍을 표방한 관객참여형 파트와 퍼포머 및 밴드 중심 파트가 어우러진 채 진행됐다. 김주빈·방준성·이채영의 3인조 밴드셋이 기본이 된 가운데, 김재훈 연출이 키보디스트로 투입되어 전체적인 사운드를 만들었다. 작품에는 총 4명의 퍼포머가 활약했는데 그 중 이다연·정수동·홍준영은 무용수로 분했으며 마지막 한 명인 김정윤은 무용을 포함해 워크숍 진행, 독창, 1인 연극과 같은 다양한 무대를 선보였다.
‘이곳은 교회가 아닙니다’라는 이름의 TINC는 폐교회를 개조해 만든 대안적 공간이었다. 넓은 공간 앞쪽에는 제단이, 왼편으로는 밖으로 난 창이 여러 개 있었다. 교회당에서 볼 법한 기다란 나무 의자가 객석이었는데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무대 중앙을 바라보며 배치되었다. 프로젝터는 바닥에 강한 빛을 쏴 제단 중앙부에서부터 공간의 중심까지 마치 빛의 런웨이와 같은 무대를 만들었다. 이 작품은 ‘갈등과 전쟁으로 치닫는 세계에서, 화성학이 조화의 언어로 기능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 아래 독특한 공연을 보여주었다. 기본적으로는 ‘화성학’의 기초이론을 무대예술로 확장하 되, ‘화성학’의 체계 안에서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이슈들을 퍼포먼스적·연극적 장면으로 확장해 무대 전체에 녹여냈다.
권사님과 함께하는 합창 워크숍
성악가 김정윤이 진행하는 합창 워크숍으로 공연이 시작됐다. 김정윤은 대구 사투리를 구사하는 권사님 캐릭터를 연기했는데, 이런 설정은 해당 성악가가 ‘성가대복’을 벗어던지지 않는 이상 극 내내 유지되었다. 김정윤은 호들갑스럽게 자기를 소개한 뒤 곧바로 헨델의 오페라 아리아 ‘울게 하소서’를 불렀다. 무반주로 시작된 노래에는 키보드 반주가 살짝 더해졌고, 아마도 예민한 관객들은 이 노래와 함께하는 화성의 어울림에 즉각적인 감동을 느꼈을 것이다.
김정윤은 관객에게 입과 혀를 푸는 방법을 알려주었고, 곧 객석을 소프라노, 알토, 테너, 베이스 파트로 나누었다. 그리고 무대 앞쪽에 제시된 가단조의 악보에 맞추어 각 파트의 선율을 연습시켰다. 한 성부씩 배정된 선율을 불러보고 이어 모두 함께 네 성부를 노래하는 식이었다. 관객이 전문적인 성악가가 아니어서 노래를 제대로 부르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지만, 그럼에도 모든 이들이 함께 소리를 내고 그 안에 ‘화음’이라는 요소가 작동한다는 감각이 흥미로웠다. 15분가량 진행된 합창 워크숍은 두 가지 측면에서 의미를 발생시켰다. 첫째, 관객이 스스로 소리를 내 봄으로써 이후 등장하는 청각적인 자극을 보다 예민하게 감지할 수 있게 되었다. 둘째, 반복해서 불러보고 들어본 노래 선율이 공연 막바지에 다시 등장함으로써 40여 분간 진행된 공연이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됐다.
몸과 함께 하는 음의 움직임
관객이 부르는 4성부 합창이 마무리되는 동시에 노래 반주에 섞여 나오던 ‘A음’이 길게 늘어졌다. 바로 이 440Hz의 전자적 주파수와 함께 퍼포머 한 명이 등장했다. 퍼포머는 화음의 구성요소 중 ‘근음’을 담당한 이로서, 손에 전구를 들고 공간 중앙의 런웨이 무대를 누볐다. 곧 옥타브 위의 A음 역할을 하는, 조금 민첩한 움직임을 하는 또 다른 이가 나왔고, 이런 방식으로 화음의 5음에 해당하는 퍼포머와 3음에 해당하는 퍼포머가 각각 전등을 들고 나왔다. 각 퍼포머들은 서로 다른 파형을 가진 음들과 함께 자신만의 춤을 추었다. 단지 네 명의 퍼포머가 4개의 음을 들려준 것 뿐이었음에도 다양한 인체의 형상과 그들이 손에 든 빛, 그리고 네 가지 전자적 진동으로 지극히 풍성한 무대가 만들어졌다.
일단 퍼포머 한 명이 ‘음 하나’를 담당한다는 것이 인지되자, 이제 이들이 스윽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형상이 ‘음의 움직임’으로 다가왔다. 무대 바닥에는 긴 선이 다섯 개 그려져 있었고, 퍼포머들의 움직임에 맞추어 전자음이 변화하는 음높이를 표현했다. 소위 화음 의 구성음들이 서로 위치를 바꾸는 ‘화음의 자리바꿈’을 무대화한 것이다. 이어진 ‘7화음의 해결’ 파트도 유사한 방식으로 진행됐다.
소품으로 사용된 전구도 언급할 만하다. 공연 내내 거의 암전에 가까운 어둠이 유지됐는데, 이 안에서 퍼포머가 들고나온 전구들은 그들의 몸짓을 돋보이게 했을 뿐만 아니라 시각적으로 ‘움직이는 조명’과 같은 효과를 만들었다. 애초에 무대와 객석의 단차가 없는 공간이었기에 퍼포머들의 움직임과 표정 하나하나가 관객에게 직접적으로 전달되는 터, 여기에 조명이 각각의 몸을 비추자 옷깃이나 얼굴 근육까지 모든 것이 섬세히 빛났다. 누구라도 그 공간 안에서 퍼포머의 움직임과 감각에 밀착되어 있다고 느꼈으리라.
사회를 은유하고 음악으로 전복하기
‘자리 바꿈’을 표현하는 퍼포머들은 특이하게도 서로 눈빛을 교환하거나, 독특한 손짓을 하거나, 아니면 마임을 하듯 특정 동작을 반복했다. 마치 화성학에 내재한 다양한 속성 중 ‘위계’를 사회적 통념과 엮어 유머러스하게 풀어낸 것 같았다. 각자 맡은 자리에서 이동해 다른 ‘위치’로 가고 싶은 그들의 움직임을 사회적으로 은유했달까? 굳이 계급이라는 개념까지 도달하지 않더라도, 움직임 자체가 전자음의 ‘글리산도’로 묘사되었기에 자리 바꿈이란 것이 한껏 에너지를 써야만 가능한 행위처럼 보였다. ‘7화음의 해결’도 마찬가지였다. 추상적인 음의 등장과 그 화성적인 해결이라는 개념이 ‘인간 사회’에 겹쳐지자 유머러스하게 이를 의미화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퍼포머들이 주도한 섹션이 지나고, 이어 김정윤 성악가가 홀로 무대에 걸터앉아 “Stone in my head”라는 가사의 노래를 시작했다. 베이스의 단출한 반주만으로 도입되어 한참을 진행한 이 음악은, 드럼 및 일렉기타의 등장과 함께 완전히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빠른 속도 위에 본격적인 베이 스 리프가 깔리고 디스토션을 먹인 전자기타의 하모닉스 소리 위로 이펙터를 넣어 변조한 음성이 울려 퍼졌다. 근사한 하드코어 랩 메탈 사운드였다. 관객은 머리로 사고하는 것이 아닌, 몸으로 소리를 느끼며 해당 시퀀스를 즐길 수 있었다.
영문도 모르고 메탈 음악을 듣던 관객은 노래가 끝나고서야 직전에 청취한 음악이 교회나 사회 속 남녀유별을 표현하고 있으며, 이를 ‘여성의 목소리를 남성처럼’ 변조해 표현했음을 알게 되었다. 다시 등장한 ‘권사님’이 아무리 노래를 잘해도 교회에서 주인공을 맡지 못했던 여자아이 이야기를 들려줬기 때문이다. 화성학에도 소프라노·알토·테너·베이스가 서로의 영역을 교차하지 못하도록 하는 규칙이 있다. 하지만 공연은 이런 규칙을 하드코어 음악으로 되받아쳤다. 사회를 꼭 닮은 음악의 규범이기에, 이를 무대 위에 드러내고 다시 음악으로 전복하는 것이 가능한 셈이다.
다시 음악으로, 결국 음악의 힘으로
공연 초반 3화음을 구성하는 세 개의 음이 고유의 진동으로 울리기 시작 했다면, 자리바꿈 파트의 후반부에서는 드럼과 베이스가 경쾌한 모드의 음악을 연주했다. 이어진 7화음의 해결 파트에서는 단출한 화성 진행이 건반악기로 홀로 제시되고 이어 섹션 후반부에서는 이러한 화성 진행을 토대로 하는 밴드음악이 이어졌다. 이런 과정에서 원 코드 잼 혹은 리프를 반복하는 음악들은 단순한 화성진행을 풍부한 사운드로 탈바꿈시켰다. 음악이론에서 다뤄지는 음들이 조촐하고 화음 또한 비교적 단순했음에도, 이런 음들이 ‘록’이라는 풍성하고도 이글거리는 사운드로 구현된 것이다.
극의 마지막 섹션에 이르자 합창 워크숍에서 배웠던 가단조 화성 진행이 밴드음악으로 전개됐다. 일렉기타·드럼·베이스·건반으로 구성된 음악은 14마디 남짓의 화성 진행을 토대로 화려한 사운드를 선보였다. 초반에는 얌전히 반주 하는 것 같던 악기들은 각자 다양한 기법을 총동원해 음향을 점진적으로 두텁게 만들었다. 리프의 반복과 음향의 변주를 거치며 감정이 고조됐고, 이 소리에 맞추어 춤을 추는 퍼포머의 움직임도 점점 더 격렬하게 변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화성학실습>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또 다른 테마를 느낄 수 있었다. 일렉기타는 자유롭게 즉흥연주를 하는 듯 하며 본인에게 허용된 음계의 범위를 살짝 이탈했다가 되돌아왔으며, 드럼 역시 4박에 5박을 끼워 넣는 등 자신만의 방식으로 박자의 위계에 저항했다. 그리고 마지막 순간에는 건반의 메인 선율이 어딘가 찌그러진 듯 혹은 색이 바랜 듯 불협화적인 소리를 연주했다. 누군가는 이렇게 ‘일그러진 소리’를 들으며 ‘규칙’을 논하는 화성학에서 벗어난 해방감을 느꼈으리라. 이에 맞추기라도 하듯 네 명의 퍼포머는 커다란 몸짓과 함께 관객석 사이를 돌아다니며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렇게 관객은 음향 규칙으로부터 이탈한 소리들, 퍼포머들의 움직임, 그리고 ‘창문을 엶’이라는 행위를 통해 규칙의 전복, 그리고 이로 인한 새로운 시공간의 창출을 음악적 카타르시스와 함께 경험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으로 <화성학실습>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음악의 힘으로 관객을 설득하게 된다. 성부 진행, 짜임새, 음향, 밴드셋 등의 음악 요소를 입체적으로 확장했기에 이를 다시 음악적 경험으로 오롯이 체험하는 것이 가능한 것이다. 사실 다매체작품 혹은 다원예술 등에 삽입된 음악은 극의 장식으로만 활용되며 전체 맥락을 관통하지 못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다. 하지만 <화성학실습>은 초반 합창 워크숍에서 특정 화성 진행을 제공하고, 여기에서 지배적인 몇몇 음을 몸으로 표현했으며, 퍼포머를 반주하며 밴드셋의 음악을 출현시키고, 하드코어 보컬의 반주를 통해 음향적으로 점차 고조된 사운드를 들려주다가,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서는 이 모든 요소를 증폭된 상태로 그리고 일부는 규칙을 벗어난 형태로 들려주었다. 이런 흐름이 있었기에 <화성학실습>은 음악의 온전한 힘을 보여주는 다매체 실험에 성공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작품이 보다 확장된 규모로 관객을 만날 본 공연이 기대된다. 무대예술로 확장된 음악 이론이 그 안에 사회를 다루고, 다양한 사회적 문제들을 음악으로 전복시키는 것은 물론 그 안에서 대안적인 해법을 상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출처] 한국문화예술위원회